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후계자 문제 ===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후계에 대한 말에 몹시 민감해서, 누군가 그에 대한 진언을 올리기라도 하면 몹시 격노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후계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계를 정하는 순간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성이었고 당시의 가치관으로써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로, 왕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계자로 지목한 자가 남성이라면 그를 옹립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서 퇴위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었다. 여성이어도 그녀보다 젊은 이상 언제 그녀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가의 여성들(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가 즉위하기 전 [[제인 그레이]]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도 알고 신하들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후계감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밖에 없다는 건 명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라 이미 [[튜더 왕조]]가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 [[헨리 8세]]의 후손들은 남지 않았다. 결국 헨리 7세의 여계 후손 중에서 후계감을 골라야 했고,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앞서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제임스 6세는 헨리 7세의 현손자이며 마거릿의 증손자였기에 혈통면에서도 최우선 순위였고, 엘리자베스의 항렬상 손자뻘인 6촌으로 나이도 적절했다. 스코틀랜드 역시 종교개혁으로 장로회파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에,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과 로마 가톨릭에 치를 떠는 국교회 교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후계자감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전임 메리 스튜어트 시절 어그로를 끈 것과 달리,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과 크게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제임스 6세마저 칼뱅파 교리에 따라 교육을 받았었다. 1603년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여왕이 자리에 드러눕자 신하들이 ([[답정너|다 알면서도 혹시나]])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냐 물어봤고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왕의 자리는 왕의 후손이 물려받아야지 농부의 자식이 물려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대답하니 신하들은 그게 누구인지 잘 생각나지 않아서 힌트를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여왕은 벌컥 화를 내면서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에 사는 친척]]밖에 더 있겠느냐!"''' 라고 일갈했다. 실제론 여왕이 임종 전 비몽사몽할 때 재빠른 신하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오는 제임스 왕을 환영하러 나가서 온갖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 [[파일:external/www.awesomestories.com/e4094a95b0.jpg]] 치세 말년에는 충신이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1601년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처형당하여 고령의 여왕은 심신이 지쳐갔고, 결국 1603년 3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옆자리는 애증의 대상이던 언니 [[메리 1세]]가 안장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 것 같은 비문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여담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곳의 지명을 [[버지니아]]라고 부르도록 했다.[* 처녀의 땅이라는 뜻. 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월터 롤리 경이 제안했다고 한다. 월터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가 지나갈 때 진흙탕이 있자 망토를 벗어서 깔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처음 버지니아로 이주시킨 [[로어노크 식민지]]의 남자 85명과 여자 17명이 모두 [[풍토병]]으로 죽어버려서, 1607년 새로 건설된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륙 개발이 이루어졌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청교도 106명이 메이플러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하는 것으로 미국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메이플라워 호의 개척자들은 당시 국교회에 반발한 분리주의자들로서 플리머스에 정착했는데, 이는 비인가 식민지였으며 시기적으로 제임스타운보다 13년 뒤인 1620년에야 만들어졌다.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된 버지니아는 빠르게 발전하여 [[미국 내전]] 전까지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플리머스 식민지는 곧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흡수되었는데, 이 식민지는 청교도 중심이기는 해도 왕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매사추세츠 만 회사를 통해 1929년 설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